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문단 편집) == 생애 ==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주]] 스타로루스키에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총 3남 3녀를 낳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그중 4번째 자식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부친은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이었으며 모친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로 결혼시에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유복했다. 다른 상당수의 유명한 음악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어린시절부터 일찍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세 때 자청해서 피아노를 배운 이후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랴빈 에튀드|스크랴빈의 에튀드]] 5번을 무려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로는 2, 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초기작품인 만큼 스승에게 습작성을 어느 정도 지적받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개정을 했다. 이 개정시기가 2,3번 협주곡을 작곡한 뒤의 일이기에 그의 협주곡 1번을 첫 번째 협주곡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상당히 많다.] 그 후 24살에 [[교향곡 제1번(라흐마니노프)|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으며[* 심지어 [[세자르 큐이]]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이 마치 "이집트의 7가지 재앙을 묘사한 것 같다" 며 "지옥의 음악학교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음악일 것이다" 라고 악평했다.] 그 충격으로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 초연 당시 지휘자였던, 애주가였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한 채 지휘를 했고, 그 때문에 연주를 망쳤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때문에 이 곡은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다.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정교회|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훗날 자서전에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는 나의 꿈은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3, 4년 동안 하루의 대부분을 멍하니 앉아있었다."라고 회고한다.]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이 명작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초연 이후 박수가 1시간이나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참고로 연주 시간이 45분 정도이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템포가 굉장히 빠른데, 이 녹음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중에 최악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했다고. 녹음 기술의 한계로 시간 제약에 의해 빠른 속도로 녹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을 고친 방법은 '자기암시 기법'[*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후 계속 어떠한 말을 되뇌임으로써 실제로도 그런 효과를 볼 수 있게 암시시키는 것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에는 누워 있던 그에게 주치의 니콜라이 달이 "당신은 곧 새로운 협주곡을 작곡할 것이며, 그 곡은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라고 계속 말해 주었다. 이 치료는 약 3달 정도 진행되었다.]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 이 곡은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https://leerestelle.tistory.com/57|니콜라이 달]](Nikolai Dahl) 박사[* 우크라니아 태생의 신경학, 정신의학, 심리학을 전공한 정신의학자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우울증이 극심해지던 1900년 1월에 그와 만나 3달 동안의 최면요법 정신치료를 시전했다. 한편 그는 [[비올라]] 연주도 할 줄 알았고 이 때문에 [[피아노 협주곡 2번(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2번]]의 공연 때 관객들이 그에게 활을 들어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인생 최대의 슬럼프 시절이었던 우울증 시기를 다루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선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니콜라이 달 박사가 양대 주연으로 간택되었다.]에게 헌정되었으며,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1901년 11월 09일 초연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느낌을 좋아한다면, [[교향곡 제2번(라흐마니노프)]]도 다른 피아노 협주곡들과 같이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뒤이어 1909년에 [[피아노 협주곡 3번(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http://www.youtube.com/watch?v=aSXtXLAVgkE|악보와 함께 듣기]]) 이 곡은 연주하기 어려운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유명하며,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 호프만은 표면상 자신과 맞는 스타일이 아니라 했는데 전문가들은 손이 작은 이유로 거절했을 거라고 추측한다.(호프만의 손은 9도 정도 됐다고 한다. 도에서 도까지 짚고 레를 짚는 정도.) 평균적으로 봤을 때 작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피아니스트의 견지에선 별로 큰 손이 아니다.] 영화 [[샤인]]에서는 [[http://en.wikipedia.org/wiki/David_Helfgott|데이비드 헬프곳]]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분열정동장애를 일으켰다고 묘사된다.([[http://youtu.be/kECQ_7QoMPs|헬프곳의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연주 듣기]])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리고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라흐마니노프의 피협 3번 레코딩이 존재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4곡의 레코딩은 2, 3번이 비슷한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남은 두 곡은 연주가 뜸한 편.] 그중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 직접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호로비츠]]의 연주들이 유명하다.[* 참고로 이 곡의 카덴차는 빠르고 가벼운 원곡과 중후한 오시아(ossia)의 2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호로비츠의 카덴차는 기본적으로 전자를 모티브로 하되 호로비츠 특유의 저음부를 보강한 제3의 카덴차로 오직 호로비츠의 연주에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 연주의 난이도로 특히 유명하긴 하지만 작품성도 이전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실험적인 부분이 돋보이는 훌륭한 곡이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일단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매우 높게 샀는데,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적은 수의 작품만을 작곡하였다. 급격히 변해가는 음악계에서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로서는 [[장 시벨리우스]]가 그러했듯 점진적 절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미국으로 망명간 이후 [[소련]] 정부와 그와의 관계는 대체로 나빴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혁명 성공 이후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러시아 내에 있는 그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는 소련의 문화 정책을 비판하는 [[뉴욕 타임즈]]의 기사에 서명한 바 있고, 소련에서는 1930년대에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대한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다.] 그래도 조국이라는 생각은 있었는지 말년에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군]]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어 그 수익금을 소련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 당국의 요청으로 귀국을 고려하였던 듯하나,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작곡보다 연주활동을 더 자주 했었다.] 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큰 나머지, 2~3년 정도의 연습을 통하여 정식으로 연주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http://youtu.be/pBx-tr1FDvY|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 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큰 손은 [[마르팡 증후군]][* 유전병의 일종으로 육체적으로는 신장을 비롯해서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척추나 다리가 휘기도 하며 정신적으로는 신경쇠약을 동반한다. 실제로 라흐마니노프의 신장은 무려 198cm이다.]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이와 더불어 손가락의 관절도 굉장히 유연해서 오른손 2, 3, 4, 5번 손가락으로 도-미-솔-도의 C코드를 짚은 뒤 '''엄지를 손바닥 아래로 밀어넣어 1옥타브 위의 미를 짚을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엄지로 미를 짚고 검지를 왼쪽으로 넘겨서 1옥타브 아래에 있는 도를 짚은 채, 3, 4, 5번 손가락으로 그 사이에 있는 미-솔-도를 짚었다는 소리다. 이쯤되면 이미 [[인외|사람의 손인지 의심이 가는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 여담으로 손 크기 큰 사람 중에 시브킹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인간은 기록상 거의 14~15도까지(대략 도에서 도짚고 시까지 남는) 짚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손 크기로써 불가능할 만한 곡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을 주제로 하는 이런 [[https://www.youtube.com/watch?v=ifKKlhYF53w|연주 겸 콩트]]도 있다.[* 해당 곡은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2번(작품번호 3). 나무조각으로 한꺼번에 치는 부분은 원래 첫 번째 음표를 치고 나서 옥타브 위로 빠르게 도약하여 다음 음표를 쳐야 하는 부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YkssqyYkc&list=PLEE72C955DB59C32C|악보와 함께 듣기]]]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인기를 끈 이유가 '큰 손'뿐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고 유연한 손으로 구사할 수 있는 기교, 테크닉적 완성도'와 '큰 몸으로 낼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있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 작곡가로서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일반적인 생각만큼 드문 예는 아니다. 고도프스키의 경우 그의 음반은 많은 수가 피아노롤이긴 해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그 이외에도 스크랴빈과 프로코피예프, 심지어 [[카미유 생상스]]도 자기 음반을 냈다. 유튜브에 "(작곡가 이름) plays" 로 검색해 보면 금방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작곡가 본인의 해석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연주자들의 해석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라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임의의 편집이 가능한 피아노롤은 정직하지 못한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 왜곡이 많이 이루어졌으니 걸러 들을 것.[* 피아노 롤은 직접 치는 게 아니라 연주한 본인의 롤을 돌리면서 피아노가 자동 연주하는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연주의 형태가 칠 때 그대로 100% 재현되는 게 아니니(nwc나 피날레 같은 작곡 프로그램에서 악보를 전자음으로 자동재생시키는 것과 원리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천공 카드 재생은 진짜 피아노를 연주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전자음이 나지는 않는다.) 취향상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레코드를 듣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유튜브에 의외로 작곡가가 직접 연주한 레코드도 상당히 많다.]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